대학에서의 건축디자인 공부는 늘 흥미로웠다. 거장들의 작품을 보면서, 어떠한 생각을 하기에 이렇게 다른 건축으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하며 그 과정이 항상 궁금했고, 그 과정을 따라가 보고 싶었다. 어느 교내 상담 시간에 디자인 프로세스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디자인 할때마다 항상 안개를 헤매는 느낌이라고 담당 교수님께 여쭈었다. 당시 교수님은 원래 디자인이란 그런 것이라며 넘어가셨고, 그 이후 나는 내가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선 하나의 여정을 겪은 것 같기도 하다. 디자인 프로세스를 어떻게 구체화 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도출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현실의 필요를 동기화 시키는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왔다. 물론 디자이너마다 프로세스와 접근방법은 천차만별이지만, 디자인 프로세스의 큰 줄기를 실무와 학업을 통해 스스로 찾아내게 되었다. 어쩌면 그때 나처럼 질문을 품고 있는 학생들에게 디자인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방법을 나누고자 한다.
디자인 프로세스는 디자인 개발이 진행되면서 특정 아이디어가 결과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뜻한다. 다른 말로 프로젝트에 어울리는 컨셉(개념)을 정하고 그 컨셉에 맞게 디자인을 만들어 나가는 전체 과정을 말한다. 좋은 컨셉은 그 결과물이 시간, 환경, 그리고 쓰임에 적절하게 일관성 있는 방법으로 사용자에게 전달된다. 통상 널리 쓰이는 컨셉이라는 말은 여러 의미를 포괄함과 동시에 개념이라는 말로 축약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컨셉을 좀 더 다른 언어로 정의하고 컨셉을 만드는 과정, 즉 프로세스를 구체적으로 세분화 해보고자 한다.
Quantitative & Qualitative research findings > Key challenge > Theme > Thesis
정성적, 정량적 리서치 > 핵심과제 > 주제 > 논지
정성적, 정량적 리서치 (Quantitative & Qualitative research findings)
디자인 프로세스는 정량적, 정성적인 자료조사(research)를 통해서 출발한다. 전방위적인 조사와 탐구를 통해 해당 프로젝트에 의미있는 발견을 도출해야 한다. 인문 역사학적 자료, 인구 사회적 통계지표, 도시 문화적 맥락, 물리적, 비물리적 환경에 대한 데이터 등이 이에 해당한다. 프로젝트가 가진 태생적인 조건을 여러 맥락에서 강점, 취약점, 가능성, 위기요인 등으로 평가한다. 분석결과는 단순한 사실의 취합을 너머 분석 내용과 프로젝트의 본질의 연관성과 그 중요도에 따라 내용의 위계를 정리하고 분석 결과를 정제해 나간다. 즉, 조사한 내용중에서 어떤 것이 더 의미있고 성공적인 프로젝트로 이끌어질 가능성이 있을지 사고해야 한다.
핵심과제 (Key Challenge)
다음은 분석한 내용을 토대로 핵심과제(key challenge)를 정하는 것으로서, 프로젝트의 가치가 창출되는 첫번째 단계이다. 팀 작업일 경우는 이 시기에 팀원들과 함께 브레인 스토밍 회의를 통해 프로젝트를 바라보는 주요한 시각을 결정짓게 된다. ‘나는 이 지점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해’라고 정하는 것이다. 이 과제를 해결하면 다른 작은 문제 여러개들을 해결하는것 보다 훨씬 유의미하고 파급효과가 크며, 프로젝트의 본질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과제를 특정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참여한 디자이너의 철학, 의도, 감수성이 1차적으로 담아지게 된다. 선행된 분석결과와 핵심과제의 창의적 해석을 통해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방향과 의미를 찾아나가게 된다. 실제 내가 수행했던 프로젝트를 통해 예를 들겠다. 수변에 맞닿아 노상공영주차장으로 쓰이는 프로젝트의 부지는 다른 지역으로 연결되는 배의 선착장하고는 가깝지만, 부지의 높은 고저차로 지역주민의 접근성은 매우 떨어진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과제는 ‘프로젝트의 부지와 인근 수변공간(waterfront)의 지역사회로부터 단절과 소외’라고 보았다.
주제 (Theme)
핵심과제를 정하고 난 다음은 프로젝트 주제(Theme) 설정하기이다. 앞서 서술한 핵심과제를 해결하면서 이 프로젝트를 통해 어떠한 목적을 고취한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왜 하는가, 프로젝트를 통해 무엇이 좋아지는가에 대한 답을 이끌어내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기획된 프로젝트의 용도(function/program)와 핵심과제(key challenge)의 융합을 통해 주제를 제시하게 된다. 이는 듣기만 좋은 구호(slogan)로서의 목표가 아닌, 프로젝트의 존재이유에 기반한 실체적인 가치를 구현하기 위함이다. 프로젝트 주제는 선행되는 촘촘한 분석과 창의적 해석으로 발현되는 핵심과제에 기초한다면 한층 강화될 수 있다. 앞선 사례의 설명을 이어가겠다. 수변에 맞닿은 기존 공영주차장을 관광객들을 위한 전망시설 및 상업시설과 지역주민을 위한 대규모의 주차장을 복합화하는 프로젝트로 기획되었다. 프로젝트의 주어진 기능을 구현함과 동시에, 프로젝트의 가치는 지역사회로부터의 단절과 소외를 극복하는것으로서, 주제는 ‘관광수요 유입으로 인한 소외된 지역사회 활성화’로 결정지었다.
논지 (Thesis)
논지(Thesis)는 프로젝트의 핵심과제(key challenge)와 주제(theme)의 관계설정을 엮으면서 방향을 찾아나간다. 논지는 어떻게 주제를 구현한다라는 구체적인 방법을 정하는 것으로서, 목표에 접근하는 방법론 또는 스토리텔링, 디자인 도구나 기술의 활용, 여러 분야에서 프로젝트를 바라보는 시각, 주어진 환경의 특징적 상황 등을 통해서 논지를 개발 할 수 있다. ‘지역 활성화’라는 주제를 구현하는 논지는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전개 될 수 있다. 도시환경의 비물리적/물리적 연결, 외부인구의 대규모 유입, 앵커시설 개발을 위한 자본 유치, 지속가능한 도시운영 프로그램 구현, 지역의 도시환경개선 등 여러 방향으로 ‘지역활성화’라는 목표를 달성 할 수 있다. 나아가 논지 개발을 위한 사고를 확장해 본다면 지역사회를 활성화 할 수 있을 정도의 관광수요 규모의 유입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가. 지역사회와 관광수요가 어떤 방식으로 만나게 해야 서로가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지형적 단절과 지역적 소외를 어떤 방법으로 극복할 것인가 등으로 질문해 볼 수 있다.
사례로 들었던 프로젝트는 부지의 지형적 높이차를 극복하고 수변으로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지역주민이 주로 통행하는 도로 레벨에서 이어지는 넓은 판을 만들고 이를 근린공원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이 공원의 아래는 약 900대 이상의 주차 및 상업시설 그리고 멀리까지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관람시설 탑승장을 배치했다. 수변으로 확장되는 근린공원에서 지역주민과 관광객이 어우러질 수 있는 장이 되도록 하고 복합화된 시설은 지역사회와 관광객을 위한 인프라로 작동하게 했다. 이 프로젝트의 논지는 ‘관광객과 지역주민을 매개하는 근린공원형 복합시설 개발을 통한 지역활성화 도모’로 발전했다.
종합적 해석과 생각 위치 시키기 (Synthesizing and laying out the thoughts in the ideation structure)
프로젝트의 규모와 복잡도가 커질수록 관련 자료는 방대해지고 자료 분석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게 된다. 분석결과의 한 측면에 몰입하다 보면 프로젝트의 전체 방향을 잡기 어렵고, 분석과 프로젝트 방향의 논리적 연결에 집중하다 보면 발견한 모든 사실이 디자인으로 귀결 되어야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는 한다. 그렇기에 생각이 발전되는 주요 단계마다 종합적 해석 또는 창의적 통합(synthesizing)이 필요하다. 분석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재배치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그 의미를 엮어내는 종합적 사고가 필수적이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로 대표되는 a=b, b=c, a=c가 되는 일대일 대입하는 논리가 아닌, a+b+c=d가 도출되도록 디자이너만의 통합의 레시피를 개발해야 하는것이다.
이해를 돕기위해 단계별로 설명했지만 디자인 프로세스가 이렇게 선형적(차례로)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분석과정에서 중요한 발견 없이도 방법론이 떠오르기도 하고, 목표없이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에 몰입하고 있을 수도 있다. 비선형적으로 다양한 생각들이 이리저리 살아 움직이게 된다. 그렇기에 디자이너는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왜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질문하며, 생각들이 어떤 단계에 있는지를 물어 생각을 위치시켜야 한다. 그래야 아이디어들이 흩어지지 않고 프로세스의 골격으로서 단단해지게 된다.
지속적인 생각의 구조화 없이는 재기발랄한 즉흥적 발상을 수용하거나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조정하기 어려우며 초기 아이디어가 무엇이었는지 헷갈리다 결국 프로세스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이쯤되면 아이디어를 구체화해서 디자인한다기 보다 외부적인 요인이나 상황에 의해 프로젝트가 적당히 만들어지기도 한다. 생각의 구조화는 특정 단계에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전체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생각을 위치시키며 프로세스에 통합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구조화된 생각이 프로세스에 잘 통합이 된다면 프로젝트가 마무리 될 즈음에 프로젝트의 컨셉은 정제된 본질과 함께 간결한 문장으로서 응축된다.
디자인 문법(grammer)의 구축과 확장성
디자인 프로세스는 생각을 구조화 시키는 하나의 방법론이자, 디자인 문법을 개발하고 강화하는 도구이다. 훈련된 창작과정으로서의 생각의 구조화는 비단 디자인 과정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서비스나 제품의 기획, 문제 해결, 주요 의사결정, 비판적 논의시에도 적극 활용 가능하다. 여기서 설명한 디자인 프로세스는 프로젝트의 배경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 달성 가능한 가치와 목표 설정, 그리고 이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총합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렇게 생각의 구조화를 여러 방면으로 적용하다보면 창의적 사고가 정교해지며, 이는 곧 개인의 고유한 생각의 문법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최근 쉽게 접근가능한 인공지능의 비약적 발전으로 디자인 과정에서 요구되는 노동집약적인 업무의 효율이 증대되고, 새롭게 출시되는 여러 기술서비스에 힘입어 디자인 생산성도 향상되고 있다. 이처럼 인공지능으로 대체되는 일의 영역은 더욱 광범위 해질 것이기에 인공지능으로 대체하기 어려운 영역에서 독창적인 발상과 그것을 구조화해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일의 성과를 갈음짓게 될 것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여러 상황에서 생각의 구조화를 적용하고 이를 통해 고유한 생각의 문법을 견고하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면, 이 문법은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의 힘을 입어 어느때보다 그 영향력과 확장성이 더 증대될 것으로 예견된다. 사실 인공지능의 진화를 차치하고서라도 생각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구조화한 생각들을 어떠한 방법으로 세상에 구현하는가가 많은 일의 궁극적인 본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