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은 5월의 하루였다. 유럽을 여행중인 친구와 나는 베르사유 궁전 (Palace of Versailles)과 쁘띠 트리아농 (Petit Trianon)을 가보기로 했다. 특별히 프랑스 고전주의 건축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곳으로 가보면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만 같은 기대감에서였다.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화창하고 완벽한 날씨였다. 베르사유 궁전 내부는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만들어낸 미, 기교 그리고 정성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권력과 문화 번성의 크기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여백 없이 빼곡히 채워진 문양, 조각, 그림, 텍스처는 앞다투어 경쟁이라도 하는 양 화려함을 뽐냈다.
밖으로 나왔을 때 펼쳐지는 오픈 스페이스의 크기는 내부에서 못 보여준 여백을 이곳에다 모두 모아서 풀어놓는 듯 했다. 궁전의 축과 호수의 축이 맞닥뜨린 지점에 올라서자 마자 “와~ 엄청 크다! 시원하다.” 라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자연의 일부인 호수와 나무들을 인간의 사상, 의식, 이상 등을 위해 이렇게 재단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에고를 과시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과시된 인간의 에고가 시대를 지나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문화적 유산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참 다행스런 일이다.
고백하자면 조경디자인 (Landscape Design) 에 대해 큰 기대는 없었다. 건축과 도시디자인을 중점으로 공부했던 터라 조경디자인은 그저 나무를 건물에 맞춰 잘 심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어렴풋이 예상만 할 뿐이었다. 보통 기계적으로 업무를 나누는 경우, 건축가가 우선적으로 건물의 배치도를 그리면 나머지 공간을 조경가 (Landscape Designer)가 보다 부드러운 재료들 (꽃, 나무, 바닥 포장재료, 물 등) 로 채워나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우습게도 장대한 조경디자인에 무한한 감동을 받았다. 책에서만 보던 프랑스식 정원 스타일의 배치도와 사진에서 느낄 수 없었던 깎아 만들어진 오픈스페이스의 크기 그리고 이 모든 곳들이 연결된 공간 구성은 현실이 아닌 영화 속을 걸어 다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대형 스케일로 매끈하게 재단된 프랑스식 정원들을 (Bassin de Flore, The Orangerie garden, Fountain of Latona, Grand Canal, the bosquets) 헤매다 드디어 쁘띠 트리아농의 영지로 들어섰다. 아, 갑자기 포근함과 안락함이 들었다. 나무들과 길들이 편안한 곡선의 형태로 배치되어있고, 다양한 나무, 풀, 꽃들이 여러 단계로 레이어링 되어 있는 것 이었다. 개울은 부드러운 흙과 들풀로 구성된 언덕으로 만들어지고, 작은 개울을 건너가는 다리 역시 간단하고 소박한 돌들과 나무로 디자인 되어 있었다. 작은 꽃들을 따로 키우기 위한 프레임된 정원이 있었고, 정원과 밭들을 드나드는 아치형태의 입구들도 자연의 재료로 디자인 되어 있었다. 길을 따라 종종 만나게 되는 아주 화려하고 키 큰 꽃나무는 여배우의 화려한 시상식 드레스가 연상되었다. 기다랗게 뻗은 물풀들 사이로 강렬한 색감의 꽃들이 오밀조밀 얼굴을 내밀고, 넓은 잎의 나무들과 낮은 풀들이 촘촘히 함께 있는 곳들은 조그마한 풀잎 동굴들을 만들어냈다. 탁트인 하늘아래 수형이 미려한 몇몇의 나무들은 넓은 들판위의 영웅같은 자태를 뽐내고, 우아하게 옆으로 넓게 퍼진 나무들은 뜨거운 오후의 낮잠을 부르는 그늘을 만들어냈다. 오감이 깨어났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새소리,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 순간 그곳의 일부로서 내가 존재했었다는 것이 감사했다.
수목이 만들어내는 칼라들과 텍스쳐가 너무나도 다양하고 싱그러워 손으로 만져보고 싶었다. 수목을 칼날로 조각된 모습이 아닌, 자라는 방식과 그에 따라 변화화는 모양, 생의 주기에 따라 배치되고, 또 길을 따라 걸을 때 수목이 조합된 방식이 변주되면서 생동감 있는 공간의 시퀀스를 만들어냈다. 비싼 건축자재들로 에워싸진 그 어떤 실내공간 보다 훨씬 다양하고 즐거웠다. 가을에는 어떤 풍경을 그려낼까, 겨울에는 어떨까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순간 마리앙투아네트가 왜 이런 공간을 사랑했는지 마음으로 이해가 되었다. 이 아름다운 자연이 만들어내는 공간을 통해서 그 스스로도 많은 위로를 받았으리라. 계절, 낮 과 밤, 수목과 바닥의 질감들의 움직임에 따라 공간이 음악처럼 흐르고 있었다. 자연의 숨소리를 듣고 그 호흡을 쫓아서 랜드스케이프 디자인으로 풀어내 놓은 것이었다. 역동적으로 살아 숨쉬는 자연의 모습을 섬세하게 보여준 이 공간은 일상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날의 기억은 자연이 만들어낸 교향곡을 원 없이 즐겼던 날로 마음 속 깊이 새겨졌다.